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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중드가 보고 싶어져, 뭘 볼까 고민하다가 요새 내가 가장 기다리는 중드가 여의전이고, 여의전 남자주인공 건륭제를 분한 배우가 곽건화이니, 곽건화 출연작을 보자 마음 먹었다. 근래에 곽건화가 출연했던 작품 중에 여의명비전이 있는데 그닥 끌리지 않아서 더 이전 작품인 화천골을 고른 것이다. (금옥량연을 보지 않은 건 1, 2회를 봤었는데 너무 내 취향이 아니었다.)


아무튼 화천골은 주연 배우 둘 : 곽건화, 조려영 모두 안면이 있었는데, 특히 조려영은 영화 <궁쇄침향>에서 연기가 꽤 괜찮았던 걸로 기억해서, 초이스.


우선 <화천골>은 신선이 등장하는 무협물인 선협(仙俠)물이며, 연출을 맡은 임옥분 감독이 근간 핫한 중드 <삼생삼세십리도화>의 연출역시 맡은 바있다.(화천골이 삼생삼세십리도화보다 이전 작품이다.) 둘 다 소설을 드라마화했고, 장르도 동일한지라 한 연출자가 이 두 작품을 전부 드라마화했다는 점에서 조금 재밌는데, 그 부분은 후술하도록 한다.


각설하고, <화천골>의 세계관 속에서 신선은 허구의 존재가 아니며, 마계 역시 실존한다. 이 선계의 으뜸 문파인 장류선문이 마계를 경계하며 육계(六界, 모든 중생이 윤회를 거듭하는 여섯 세계로 지옥, 축생, 아귀, 수라, 인간, 천상. 즉 ‘모든 세계’)의 평화를 위해 선계를 이끌어 가고 있다는 게 기본 설정이다.


주인공 화천골은 날 적에 초목과 꽃이 모두 시들었기 때문에 촉산선문의 장문 청허도사가 ‘화천골(花千骨)’로 이름을 지어 주었다. 쉽게 말하자면 천 송이 꽃들이 모두 시들어 뼈만 남았다골로 갔다는 얘기다. 여하간 이름부터 불운한 느낌이 강하게 드는 주인공은 편부가정에서 마을 사람들의 괴롭힘에도 무럭무럭 자라 16세가 됐고, 청허도사가 아비에게 남긴 말마따나 16세가 되면 촉산으로 가 도를 닦기로 한 그 시점이었다. 아버지는 병석에서 오늘내일 하는 처지였는데, 이때 장류선문 장문이 되기 전 통과의례로 인계에 내려 온 남자주인공과 일별한다. 당연스럽게도 둘이 사건을 함께 겪고, 자신을 묵빙이라 속인 남자주인공 백자화는 홀연 선계로 돌아가고 중간에 또 사건에 휘말리지만 어쨌든 화천골 역시 장류선문에 입문하게 된다.


백자화는 오상선 중 한 명인데, 오상선이란 상선(上仙) 중 이름 날리는 다섯 명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여하간, 백자화는 장류선문의 수령인 장문이 되어 존상이라 불린다. 백자화는 법력이 고강함은 물론이거니와, 항시 육계와 억조창생에만 관심이 투철한 이로, 그린 듯한 이상적인 신선이라 할 수 있다. 신선의 선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욕칠정을 끊는 일인데, 특히 삼정(분노, 애정, 탐욕)을 놓는 것이 요구된다. 백자화는 이러한 신선의 필요충분 조건을 더 없이 충족한 신선으로, 본인 거처의 이름이 무려 절정전(絶情殿)이다. ‘절정(絶情)’, 즉 정을 끊는다는 의미다. 백자화가 자신의 유일한 제자로 화천골을 택하면서, 둘이 절정전에 머물게 되는데 너무나도 앞날 예상되는 복선이 아닐 수 없다.


<화천골>의 극을 이끄는 갈등은 두 가지다. 하나는 사제지간의 이성애이고, 하나는 요신이 봉인된 육신을 가지고 태어난 화천골의 생사 존망이다.


그 성결하고 이상적인 신선인 백자화는 금세에 하나뿐인 제자인 화천골이 본인의 생사겁(간단히 말해, 인생 망치는 액운)임을 알고도 제자로 받아들였으며, 한번 제자로 받아들인 이상 그녀가 요신을 몸에 봉인한 처지라 해도 버릴 수 없었기에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주변의 살해위협에서 지켜내려고 한다. 비록 화천골이 차차 자신을 사부가 아니라 남자로 보아 연정을 품었고, 자신이 그 마음에 부응해줄 수 없더라도 말이다. 이것이 극중에서 시종일관 지속되는 백자화 나름의 입장이다.


단지 이렇게만 보면 별 문제 없어 보이지만, ‘하나뿐인 제자’라서 본인과 화천골 모두에게 무리를 가게 하면서까지 화천골을 지켜내려는 집념이 명징하게 설명되진 않는다. 만약 진실로 단지 제자의 정리때문이라면, 화천골이 요신으로 각성하기 전에 차라리 그녀를 죽였어야 옳다. 자신의 생사겁이란 걸 떠나서, 요신의 부활이 육계에 파멸을 가져 온다는 게 자명하다면, 사제간의 정리를 우선할 순 없다. 백자화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는가. 그러나 그는 어쨌든 끝까지 화천골을 죽이려 하진 않았는데, 화천골 입장에선 차라리 사부 손에 죽는 걸 바랄 만큼 그의 화천골 구명기는 그녀를 거듭 불행의 늪으로 인도했을 뿐이다.


결국 백자화가 화천골을 차마 죽이지 못한 것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자신 역시 제자에게 연정을 품었기 때문이다. 비록 본인이 그것을 인정하진 못하더라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를 죽일 수 없었던 그는 그녀를 운궁에 가둬두고 멀찍이 바라만 보는 상당히 고착적인 결론에 다다른다.


웹을 돌아다니다 보면 백자화가 너무나도 화천골의 안위만을 걱정했기 때문에 이러한 선택을 했다는 식의 해석을 보는데, 이는 나의 백자화에 대한 유감스러운 감정을 차치하고서도 피상적인 해석이라 본다. <화천골>의 극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은 내내 확고하기 때문이다.


백자화는 화천골을 죽일 수 없으며 죽게 내버려둘 수도, 자신에게서 멀리 떼어놓을 수도 없었다, (사제이든 연인이든) 사랑하니까. 그러나 사제지간의 상궤가 엄격한 세상에서 그녀를 드러내놓고 사랑할 순 없다. 그것은 상리를 그르치는 일인데다, 자신의 오욕칠정을 끊고 살아야 하는 신선의 정점에 있는 자니까. 그렇다면, 그녀가 죽지 않게도 하면서 사제지간의 상리를 지키는 방법을 택한다. 바로 꽁꽁 싸매두고 멀리서 바라보며 그녀의 위태로운 목숨을 연명케 하는 것이다.


백자화가 진정 이타적인 사랑을 했었더라면, 둘 중 하나는 해야했다. 상리를 깨더라도 그녀를 사랑하든가. 그녀의 사랑을 잃겠지만, 창생의 평화를 위해 그녀를 죽여서 이 굴레를 끓던가. 아무리 봐도 전자를 선택하는 게 그나마 덜 비극적임에도 불구하고, 백자화는 사랑과 그녀의 목숨 중 하나도 포기하지 못했다. 결국 백자화는 아무것도 놓으려 하지 않고, 본인이 바라는 최선의 결말을 간구했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화천골은 거의 난도질 당했다 해도 무방하다. 중드가 대체로 여주인공을 굴리지만, 이 정도로 굴리는 건 본 적이 없을 정도다. 물론 사부 살리겠다고 신기를 훔치는 금기를 범한 건 대죄지만, 그녀 입장에선 몸의 상처보다는 마음의 상처가 컸으리라. 소혼침은 그렇다 해도, 다른 누구도 아니고 목숨처럼 사랑하는 사부가 자신에게 내렸던 단념검으로 형벌을 내렸으니, 화천골 입장에서는 너와 나 사제지간을 아예 끊자는 제스쳐로 받아들이기에 이미 충분하다. 백자화의 내심도 단념검으로 그녀를 단죄하면서 자신에 대한 연정을 화천골이 ‘단념’할 것을 종용하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자기의 연정 역시 단념되길 바라며.


그 다음 절정수를 얼굴에 맞은 일이나, 만황으로 보내지는 일이나, 요지에서 백자화의 검 맞는 일 등은 백자화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녀를 이미 회복불능 상태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다못해 운궁에 가둬둘 때만이라도 백자화가 그녀에게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서 본인 알고 모르는 바, 그리고 처음 자신이 의도했던 바, 그리고 바라는 바를 직접 만나 말하지 못하겠으면 서신으로라도 한장 남겼더라면, 화천골 성격에 사부의 큰 그림이었구나, 납득했을 공산이 크다.


그러나 그러한 최소한의 감정적 안배조차 하지 않는 바람에 오해는 깊어질 대로 깊어져 화천골은 요신으로 각성했고, 각성해서도 사부의 입에서 ‘너를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를 희구했다. 백자화는 일이 이 지경이 돼서도, 너를 이제와 사랑한다 하여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지만, 그 한마디에 그토록 집착하는 천골에게 끝내 사랑한다 하지 않았다. 평소 사부 끔찍이 위했던 화천골의 예전 면모만 봐서도 너를 사랑한다, 다만 함께할 수 없다 이 한마디만으로도 수긍하고 어쩌면 그가 바라는 대로 회개했을 지도 모르는데도.


소설 외전 <파사겁>을 보면, 드라마에서 화천골이 백자화로 하여금 자신을 죽게 만드는 건 그를 향한 복수라기 보다는, 그 방법이 아니고서는 요신의 몸을 소멸시키기 어렵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백자화는 계속해서 그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거부했고, 백자화가 본인보단 억조창생을 위하기에(이건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천하를 두고 도박할 수 없었기에’ 그녀를 민생검으로 찔렀다.) 제 손으로 화천골을 죽이더라도 같이 죽자고 달려들거라곤 생각 안했으리라.


‘금생금세 영생영세 불로불사 불상불멸’이란 주문이 저주라곤 하지만, 백자화의 본인의 그 너르고 깊은 사랑을 단 한번도 펼쳐보인 적 없기에 당장 백자화를 안 죽게 하려면 자살시도를 하더라도 안 죽게끔 영생불멸하는 몸을 내려야 하고, 시간이 많이 지나다보면 지금 당장은 슬퍼해도 다시 억조창생 보살피며 본래의 백자화로 돌아가리라 여겼을 가능성이 크다.(거기다 원래 신선의 도는 장수로 나타나기에 자신에 대한 백자화의 사랑의 정도를 가늠할 수 없었던 화천골로서는 불사의 몸을 주는 게 저주만은 아니다.) 일련의 사건들이 그걸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는 자신이 화천골을 사랑했던 증표인 팔의 절정지수 상처를 그녀가 보는 앞에서 도려내기까지 했었다.


둘 다 오해를 굽이굽이 하긴 하지만, 백자화는 본인이 의도하여 발생한 사건이 있고 오해를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어느 면으로는 본인이 불행을 자초한 면이 있는 것이다. 거기다 화천골의 마음에 대해 오해하는 사건이 없다. 화천골은 사랑하는 이가 자신의 사랑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그래서 만황으로 보냈으며, 검으로 찔러 죽이고 싶어했고, 새 제자를 들이고자 했다는 오해를 한 반면, 적어도 백자화는 그녀 마음에 대해 오해(물론 동방욱경을 사랑한다고 속았던 기간은 있었지만, 끝까지 가진 않는다.)한 바는 없다. 화천골은 거의 정신적으로 극한의 상태까지 몰린 데다 사부가 사랑마저 인정하지 않으니, 그녀의 불행은 오로지 타성에 의한 것이었고 가혹하게도 가장 사랑했던 이가 거기에 정도를 더해준 것이다.


이 때문에 화천골이 죽어가며 한 “당신은 나를 믿은 적이 없어요. 당신의 눈을 믿었죠.”란 대사가 바로 백자화의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짚어낸다. 그는 자신이 알던 화천골의 심성이나, 행동패턴을 믿지 않았다. 그토록 자신에게 헌신적이었건만, 그걸 뒤집어 생각하면 본인이 그 마음에 조금이라도 진솔하게 반응했다면(사랑을 받아주란 얘기가 아니다.) 화천골이 어련히 알아서 그의 뜻에 따랐겠는가. 차라리 빨리 마음을 인정하고 이 마음 끊어내기 위해 몇 천년 좀 떨어져 각자 수련하자, 그 이후에 우리 다시 깨끗하게 사제지간으로 재회하자고만 했어도 화천골은 알겠다 했을 것이다.


그래서 “다시 시작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신을 사랑하고 싶지 않다.”는 대사가 그리도 속 시원했건만.


결말, 왜죠?


완성도 측면에서 백자화가 요신이 된 화천골을 민생검으로 찌르고 화천골은 환생하지 못하고, 백자화는 영생불멸하며 후회하는 게 깔끔한 것 같은데. 굳이 억지로 해피엔딩, 사실 별로 해피엔딩 같지도 않은 결말을 냈다. 좀 어이가 없어서 소설까지 찾아 읽어봤지만, 드라마와 크게 다름없음에 맥이 빠졌다.


200년 후회하고 고통받으며 화천골의 혼백 찾으려고 실성해서 돌아다니면 뭐하냔 거지. 화천골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한껏 굴려진 것에 비해 드라마든 소설이든 200년이란 시간의 질량이 느껴지지 않는다. 심지어 화천골의 흩어진 혼중 겨우 하나를 가까스로 환생시킨 터라, 지능과 모든 감각이 떨어진 채다. 이런 불완전한 환생 끝에 ‘다음 생엔 다신 사랑하지 않으리라’했던 남자의 손에 떨어져 기억을 잃고 다시 사부를 자기 세상 전체로 아는 삶을 살게하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나?


화천골이 죽어가면서 다신 당신 사랑하지 않겠다 선언한 것이 단순히 백자화를 증오하기 때문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보다는 죽기 전까지 그를 무척 사랑했음에도, 그 사랑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웠으니 그런 애증으로부터 초탈하고 싶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그랬기에 환생조차 할 수 없도록 소설 내용에 따르자면, 신의 몸을 이후각에게 넘기기까지 했건만. 다시금 그 사랑으로 끌어들였으니, 나는 이게 전혀 해피엔딩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작가의 취향이 괴랄하다고까지 느껴지며 동시에 로맨스물의 한계이지 않나 싶기도 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면 그냥 환생 안하고 그 굴레에서 벗어나는 게 화천골에겐 행복일텐데, 로맨스물에선 연인의 사랑이 완성되어야(사실 굳이 이런 식으로 완성할 필요가 있나 싶다.) 행복한 거니까. 다만 그녀가 모든 굴레를 끊고 업보를 반복하는 윤회에서 벗어나 진실로 남김없이 지워져 자유로워지는 게 그녀에겐 진정한 안식이 아니었을까. 그 점에서 드라마 <화천골>의 결말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그럼에도, 광전총국의 검열로 인한 편집때문인지, 후반부 전개가 매끄럽지 않은 게 무척 안타깝지만 <화천골>의 주제의식만큼은 명확하다. <화천골>은 제목 자체가 여자주인공의 이름을 땄고, 여자주인공을 둘러싼 사건이 서사를 작동시키지만, 극 전체의 주제의식을 표상하는 감정적 서사는 남자주인공인 백자화에 집중돼 있다. <화천골>의 주제의식이란, 하나는 집착이요, 하나는 그 집착까지 아우르는 운명이다.


화천골과 백자화의 첫 만남으로 돌아가보자. 백자화는 장류선문의 장문이 되기 위해 인계로 내려간다. 장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가 인계로 내려가는 것이라면, 신선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는 삼정을 끊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백자화는 장문으로서의 통과의례를 위해 자신이 끊고 살았던 삼정을 되새겨주는 화천골을 만나게 된다. 거기다 화천골은 그의 생사겁으로, 소설에선 나중에야 드러나지만 생사겁을 무사히 넘기기 위해서는 생사겁인 대상을 곁에 두고 서로 사랑해야만 했다. 무정한 신선이고자 제자에 대한 사랑을 거부했던 백자화가 생사겁을 타넘기 위해서 결국엔 그 제자를 터놓고 사랑해야 옳았던 것이다.


허나 극중 백자화는 도리어 사제지간으로서의 화천골과의 관계, 다르게 치환하면 자기 방식의 사랑에 집착한다. 결국 이 집착을 버려야만(자신의 원하는 방식이 아닌 상대를 감화시킬 방법으로 사랑해야만), 이 둘의 비극은 끝나게 돼 있었던 것이다. 백자화는 그 집착을 끝내 버리지 못했고, 화천골을 제 손으로 찔러 죽인 후가 돼서야 깨닫는다.


이렇듯 화천골을 만나기 이전 절정전에서 보냈던 그의 나날은 실지로 진정한 절정(絶情)이 아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자신을 뒤흔들 만한 대상을 마주치기 이전의 단지, 깨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온실이었을 뿐. 백자화에게 있어 인계로 내려가 화천골과의 인연을 이은 그것이 바로 이전 세상을 깬, 다른 차원으로의 진입이었다.


이 다른 세상으로의 진입은 극 저간에 운명론적 관점이 진하게 깔려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화천골>은 우리가 옳다 여겨 고집했던 일이 사실은 해답과는 정반대일지도 모른다고 얘기하고 있다. 백자화에게 본디 생사겁은 그의 생사를 앗는 겁으로서, 생사겁을 죽여야만 하고, 또한 요신이 몸에 봉인돼 있는 화천골을 사랑하기는커녕 죽여야 하는 것이 표면적인 운명이었다. 그러나 운명의 본연은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 화천골을 곁에 둬야 하는 것이었다.


장르와 극의 결을 아주 다르지만 나홍진 감독의 <곡성>에서도 비슷한 주제의식이 드러나는데, 극중 주인공은 자신의 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옳다고 고집하는 방식대로 애쓰지만 결국 파멸에 이르렀다. <화천골>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을 재단하는 절대자의 방식이 이토록이나 가혹하니, 한 번 운명으로 정해지면 그것을 극복한다 자신하더라도 결국엔 그 한계를 넘지 못함을 말해준다. 결국 백자화는 운명을 바로 읽지 못하여 연인을 제 손으로 죽이는 비극을 맞았고, 자신의 감정, 즉 운명에 순응하여 화천골과 재회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간단평


마음의 준비 없이 보면 연애고자 남주와 한껏 구르는 여주, 악역들 때문에 피가 거꾸로 솟을 수 있음. 멘탈 단련 시켜줌. 남주 얼굴이 곽건화라 참고 본 게 크다.


뱀발


상술했던 대로, <화천골>을 연출한 감독 임옥분의 후속작이 바로 <삼생삼세십리도화(이하 십리도화)>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십리도화 역시 주인공들이 겁을 겪는데, <화천골>에서 백자화에게 천골이 생사겁이었다 했다. <화천골>에선 겁을 겪어내면 선력이 배양된다는 얘긴 없다. 반면 십리도화에서는 신선으로서 선력을 레벨업하기 위해서는 겁을 겪어야 하는데, 주인공 백천의 경우 천겁을 겪고 상선(上仙)이 되었고 정겁을 겪고 상신(上神)이 되었다.


백천은 천겁을 올 시기를 가늠하지 못하여 사부인 묵연상신이 천겁을 대신 맞는다. 이후 묵연은 전신(戰神)으로서 익계와의 결전 중 법기이자 환란을 불러오는 동황종을 비롯하여 익군 경창을 자신의 혼을 바쳐 봉인한다. 백천은 복수를 다짐하지만, 천계와 익계의 화의가 이뤄진 탓에 복수는 저지당하고 혼이 흩어진 채로 시신만 남은 묵연을 자신의 모향인 청구로 데려와 시신을 보존하기 위해 매일 제 심장을 찔러 피를 자아내어 사부에게 먹인다.


7만년을 그리 해왔기 때문에, 이후 백천의 정혼자인 천계의 야화태자가 백천이 사부 묵연을 사랑한다고 오해하기 충분했다. 여기서도 비록 이뤄지진 않으나, 사제간의 이성애가 소재로 쓰인다. 묵연이야 초반부터 백천을 마음에 두고 있음이 너무나도 자명했으니(묵연은 처음부터 남장한 백천이 여자란 걸 알고 있었다.) 쌍방은 아니더라도 사제간의 사랑이 드러나며, 이 문제가 극 후반의 중요한 서사가 된다. 선협물이란 동종 장르에, 사제간의 사랑에, 감독은 동인인물이라. 거기다 야화가 사랑했던 소소가 결국은 자신의 정혼자인 백천이었다는 점에서 운명의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으니, 비슷한 주제의식도 갖고 있다.


감독 취향이 이런 쪽일까 싶다. 화천골과 달리 십리도화는 정서적으로 견디기 힘든 부분이 거의 없다. 악역의 등장이나 퇴장, 남녀 주인공의 갈등 역시 화천골에 비하자면 매우 온화한 수준. 화천골로 항마력을 다지고 십리도화를 봤더니 정말로 타격감이 1도 없었다고 한다... 십리도화 속 악역들이 아무리 날뛰어도 화천골의 악역 하나만도 못하느니...


참고로 임옥분 감독의 차기작인 류시시 주연의 <취영롱>은 현재 방영 중인데, 여자주인공이 무녀이고 무족의 땅 어쩌고, 하는 걸 보니 완전 선협물은 아니더라도 양념식으로 좀 설정이 보태져 있는 것 같다. 근데 <취영롱>은 아마 안 볼 것 같다. 그저 어서 여의전이 방영되길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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